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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회 백제기행 - 다시 갑오년, 동학기행 셋
이름 관리자 등록일 2014-10-21 13:35:36 조회수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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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마당은 갑오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2014년 하반기,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사적지를 찾아가는 역사답사 ‘백제기행_다시 갑오년, 동학기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고창과 정읍, 부안을 돌아본 데 이어, 6월에는 김제, 전주, 완주의 동학사적지를 살펴봤습니다. ‘백제기행_다시 갑오년, 동학기행’의 세 번째 일정은 <파랑새는 산을 넘고>라는 주제로 임실과 남원, 순창의 동학사적지를 찾아갔습니다. 



정읍과 고창, 전주와 공주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 주력군의 움직임과 함께 우리 지역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이번 기행에서는 임실과 남원, 순창의 동학사적지 기행을 통해 그 지역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았던 김개남 장군의 삶과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김홍기, 유태홍 등 동학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만나봤습니다.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학농민혁명 답사의 심화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백제기행의 강사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님이 맡아주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연구조사의 최일선에 서 있는 이병규 부장님의 강의를 통해 책에서 만날 수 없는 생생한 동학농민혁명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첫번째 코스는 임실 운암면 쌍암리에 있는 동학 3.1운동 무인멸왜 기념비입니다.


#1. 동학 3.1운동 무인멸왜 기념비



임실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 임실로 돌아와 동학 재건에 성공하여, 순창, 진안 등지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이들과 그의 제자들은 재건한 세력을 기반으로 동학교단(후의 천도교)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김영원의 제자인 박준승은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는 등 3.1운동과 1928년 멸왜운동을 어느 지역보다 활발히 펼쳤습니다. 3대 기념비는 이러한 일련의 운동과 그 운동의 지도자를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2삼요정(김영원)


삼요정은 임실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영원이 1883년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입니다. 1883년에 설립되었으나, 이를 설립한 김영원(金榮遠, 1853-1919)이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후인 192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습니다.



2002년에 지역주민들과 임실군의 노력으로 현 위치에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삼요정복원기념비>도 제막되어 삼요정 바로 옆에 세워졌습니다.


#3. 김홍기 묘역


이 묘소는 순천김씨 남원 대접주 김홍기 직계들만 있는 곳으로, 김홍기의 약력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김홍기는 남원 동학농민혁명 당시 방아치전투와 남원성 전투에 참전하여 지휘를 하였으며, 남원성 함락으로 민보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에는 순천김씨 제실인 추원재가 있고, 재실 뒷산에는 김홍기에게 입도한 김영기와 김종학 등의 묘소가 있습니다. 재실 맞은편 앞산에는 김홍기와 아들 손자 등 가족 납골묘소가 있으며, 이곳에는 가족내력을 적은 가계도와 건립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영실건립기가 있는데 내용을 간추리면 “남원동학의 선두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김홍기가 1895년 순국하고, 장자 종문도 1895년 환원(還元)했으며,차자 종환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수배를 받게 되어 남원에 은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4. 교룡산성(기념비)



동학교조 최제우가 은적암에 은거하며 포교와 저술활동을 하였던 사실과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최고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김개남이 남원에 대도소를 두고 교룡산성에서 농민군을 거느리고 주둔했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비입니다. 


#5. 방아치전투기념비


방아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전투입니다. 남원에 웅거하고 있던 김개남이 제2차 기포시에 주력군 5,000여명을 이끌고 북상한 후 남아서 남원을 지키던 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끌던 운봉의 민보군 사이에 치러진 격전으로 방아치와 관음치, 여원치 일대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1월 14일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였습니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6. 유태홍 묘역


유태홍 선생은 농민혁명시 지휘부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일제와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까지를 겪고 난 다음에 돌아갔습니다. 농민혁명 당시 20대 초반이었으며 방아치전투에 참전하여 지휘를 하였으며, 남원성전투시 패전한 농민군 500여 명을 이끌고 순천, 하동에서 활동중인 김인배 접주를 찾아가려 했으나 도중에 김인배의 농민군도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군대를 해산한 다음 지리산으로 들어가 목숨을 연명하였습니다.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첫 번째 옥고를 지렀고,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천도교 남원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중 가장 먼저 거사의 연락을 받고 의거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류석과 함께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는 요시찰 대상으로 힘겹게 살면서도 천도교를 지키며 남원의 신간회를 조직하여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남원건국준비위원장직을 맡으니 좌우익 갈등에 낙심하여 1달만에 사직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2세이었습니다. 한평생 반봉건, 반외세와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남원의 정신을 고양한 의지의 남원인이라고 하니 지역에 대한 애정이 생기면서도, 비석을 보자 이내 숙연해졌습니다. 이 비석은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7. 전봉준 장군 피체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1,000여명 정도의 농민군을 수습하여 11월 19일 전주로 들어갔습니다. 전주까지 전봉준과 김개남은 함께 행동하였으며, 23일 전주를 떠나며,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태인 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갔습니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는 적어도 6~7,000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에서 추격해온 일본군 및 관군에게 패해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인전투 후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11월 29일 입암산성을 거쳐 김개남과 만나기 위해 순창 피로리로 잠입하였다가 12월 2일 밤 주민 한신현 등이 끌고 온 주민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현재 순창 피로리에 있는 <전봉준 장군 피체지>에는 피신 중 당시 고부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헌병대에 인계되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현장은 현재 피체지기념전시관이 들어 선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300여m 떨어져 있습니다. 금성교 북단에서 천변길을 따라 500여m만 가면 현재 돌축대만 조금 남아 있는 집터가 보입니다. 거기가 피체지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장면중의 하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현장이며, 피체지기념관이 만들어 진 이후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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